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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잘 모르는 위대한 한국인

문방구아들stationerystoreSon 2021. 4. 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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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잘 모르는 위대한 한국인

 

바로 유한양행의 창립자 유일한 박사
세종대왕, 이순신과 더불어 국민만을 생각하신 위인


1. 유년시절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하던 유일한 박사는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란다'는 아버지 유기연 선생의 뜻에 따라 미국 국토 정중앙인 네브래스카로 유학을 떠난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어릴 적 본명은 '유일형'이었다.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다. 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고, 아버지는 승낙을 넘어서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자로 바꿨다.


2. 대학시절

[대학 미식축구부 시절 사진. 가운데가 유일한 박사]

미시건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동양인임에도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사진을 보면 라인맨, 그것도 센터로 추정된다..ㄷㄷ)유일한이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에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적었더니 아버지는 "공부하라고 미국으로 보내 놓았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이나 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의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에 참여하였다. 3.1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 때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3. 청년 사업가

자신의 힘으로 1919년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토마스 에디슨이 설립한 그 회사 맞다)에 취직한다.

1922년 사표를 낸 후 미국내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일부러 들이받아 교통사고를 냈다.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노이즈 마케팅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뮬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4. 유한양행 설립

1926년에 귀국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라초이 식품회사 경영에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러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가족들을 만났을 때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 보낸 줄 아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 일을 하라" 는 식으로 꾸짖었고 이 꾸짖음은 유일한의 유한양행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인이었던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하였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 사 경영을 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였다.


5. 독립운동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OSS의 냅코작전에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국내침투 직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실제 작전이 실행되지는 않았으며,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함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 때문에 냅코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6. 해방 이후

해방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핸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군부정권은 각 기업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내놓으라고 압박했고,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유한양행에 세무조사를 지시했고,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괴롭혔으나,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안 나는 경우가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한마디로 세무사가 필요없는 기업.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보복성 세무조사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것이 처음이었다. 휴전 후 이승만이 같이 정치를 하자고 한 제안을 유일한이 거절했으니, 이승만이 당연히 고운 눈으로 볼 리가 없다. 유일한 박사의 후원자가 박용만이었고, 유일한 자신이 외교론을 좋지 않게 봤으니 이승만이 음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이승만도 세무조사 결과를 보고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러나 유일한의 재산에는 손대지 않은 박정희와는 달리,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강제로 압수해서 써먹는 식으로 끝내 압수하고야 말았다고 한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타계하였고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7. 재미있는 일화

(1)동생과 아들의 소송
본인이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으며, 본인 선에서 정리해야 유한양행을 전문경영인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의 대한항공 사태를 볼 때 참으로 빛나는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아들인 유일선과 동생 유특한이 유일한 박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걸었는데, 소송의 내용이 '퇴직금 반환 소송'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판단해 회사에 전액을 반환하려고 소송을 건 거다.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 타 재벌들이 어떤 대도를 보였는지 보면 판사가 신기해할 만도 하다.

(2) 유산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 회장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만 제외하고 자신의 재산을 전액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407억 원이다. 1971년 당시의 407억 원이다. 지금도 407억 원의 재산이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 수 있는데, 물가 상승률을 따지면 2012년을 기준으로 17.4배인 약 7,085억원이 된다. 이 천문학적인 액수가 사회를 위해 환원됐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 씨는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 씨가 "아버님은 예전에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다. 이렇게 받은 손녀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그야말로 호부호자.

또한 딸 유재라 씨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역시 부전여전, 호부호녀.

(3) 공익, 신용, 정직
유한양행을 경영 중이던 일제강점기 때 당시 영업 담당을 맡고 있던 전항섭이라는 사람이 만주 시장 조사 후 만주에서 헤로임, 몰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의 마약류의 거래가 많은 것을 보고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류를 판매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유일한은 국민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며 단번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 했다가 자기 발언에 대해 사죄하고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유한양행 설립 후, 자기 회사의 약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의 약임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자기 돈을 내고 약을 사먹었으며, 약을 사려고 가격을 물어보는 중에 '사장님이라 그냥 가져가셔도 된다' 라고 말하는 종업원을 혼낸 일화가 있다.

(4) 삐콤씨의 탄생
국민들의 비타민 섭취를 걱정한 그는 당시 비타민 영양제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1961년 동아제약이 박카스를 출시하며 공전의 히트를 치자 다른 제약업체도 따라서 드링크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주총회에서 유일한 회장에게 "우리 회사도 드링크제를 만들어서 팔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그에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유일한 회장은 "설탕물 같은 드링크제를 약이라고 속여 팔란 말인가?" 라는 말로 주주들의 의견을 기각했다고 한다.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 회장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고 생각하여 드링크제 개발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출시된 제품이 지금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비타민 영양제 삐콤씨이다.

여러 위인전을 보면, 유일한은 약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의 품질을 살펴보며 어떤 것을 이용할 지 정했고, 비타민제에 필요한 원료가 모두 떨어지자 해당 생산라인을 원료 수급이 완료되기 전까지 가동 중단했다고 한다. 원래 생산 라인이라는 게 구조상 생산 도중에 정지를 시키면 무조건 회사에 손해가 나기 마련이고, 그 원료가 떨어져도 해당 약에 미미하게 영향을 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바로 중단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사용자의 보건과 안전을 생각했고, 그렇기에 세무조사 때 검사 당국에 유한양행의 약들을 샘플로 검사해 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5)모범적인 세금 납부
세금 납부에 대해, "소방관들에게 불을 꺼 달라는 권리는 이들을 운영해야 할 금액을 지불하는 의무에서 시작된다"며, "탈세하지 말 것"이 평전(조성기 저)에 기록되어 있다. 유한양행에서 국세청에 세금 신고를 하는 직원이 날짜를 착각했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여 벌금을 피할 수가 없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헌데 매번 기한을 지키던 유한양행이 늦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국세청 직원이 기다려 줘서 세금 납부를 잘 마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일한은, 매번 제 날짜에 법인세를 신고해 왔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 해당 직원에게 보너스보다 더 큰 위로금과 상여금을 직접 전달했다.

(6)타 재벌들과의 비교
2015년 1월 10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땅콩 회항 등의 갑질 사태를 다루는 말미에, 유일한의 유언장과 털어도 먼지 안 나던 세무조사 일화를 소개했다. 나중에 제작진이 유일한의 가족을 만나려고 유한양행에 연락해 보았지만, '회사와 관계를 맺지 않아서 연락처를 모른다'는 말은 이날의 방송의 백미였다. 하필 이날 방송에 나온 작자들이란 게 백화점 진상 모녀라든지, 조현아라든지, 김승연과 그 아들이라든지 해서 유일한과 더 비교된 상황.

8. 어록


9. 연표
1895년 -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신교 집안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남.

1904년 - 신학문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감.

1915년 - 미국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 고등학교 졸업.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

1919년 -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 대회(미국 내 한인들의 3.1운동 집회)에 참가함. 미시간 대학 졸업.

1922년 - 라초이(La Choy) 식품 회사를 창설해, 본격적인 상인의 길로 들어섬.

1925년 - 중국인 호미리와 결혼. 사업 관계로 22년 만에 일시 귀국. 일제 치하의 조선 현실을 목격.

1926년 - 12월, 조선에 돌아와 유한양행 설립.

1933년 - 중국, 타이완, 일본, 동남아 일대에 12개의 지점 및 주재소를 설치함.

1936년 -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고,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함.

1938년 - 사업상의 이유로 미국에 건너감. 태평양 전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공부를 계속함.

1942년 -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전략 정보국(OSS)에서 한국 정보 담당자로 활약. 미주 지역 항일 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에 주된 역할을 함. 일제의 세금 압박으로 유한양행이 어려움을 겪음.

1945년 - 무장 항일 투쟁 계획인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종전으로 무산됨.

1946년 - 귀국하여 초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 이승만 정권과의 불화와 유한양행의 시장 개척을 이유로 다시 미국에 건너감.

1951년 -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임시 사무소와 공장을 두었다가, 뒤에 서울로 옮김(1953).

1953년 -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귀국함.

1963년 - 개인 주식 일부를 연세대학교에 장학기금으로 기증하고, 보건 장학회를 설립. 12월, 국가 공익 포장을 받음.

1964년 - 학교법인 유한학원을 창설하고, 유한공고를 설립.

1965년 - 개인 주식을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 사업을 확대, 발전시킴.

1968년 - 유한양행이 모범 납세 업체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음.

1969년 - 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전문 경영인 조권순에게 사장직을 일임.

1970년 - 현 유한 재단의 전신인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 기금'을 발족.

1971년 - 3월 11일, 노환으로 별세. 유언에 따라 전 재산을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 기금'에 헌납함. 5월 3일,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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