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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문방구아들stationerystoreSon 2021. 4. 1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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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에디슨에 가린 비운의 과학자 테슬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Failure is the mother of success.

 Thomas Alva Edison)

바로 발명왕 에디슨이 한 명언이죠.

확실히 에디슨은 과학계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시나요?

바로 테슬라입니다.

어...?

 

테슬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으실 텐데요?

혹시 이 테슬라인가요?

물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기차 브랜드의 이름도 테슬라이지만

오늘 제가 포스팅할 테슬라는

사람 이름입니다.

에디슨과 비교하면

조금 생소하실 텐데요.

현대의 전력공학과

무선통신의 역사를 알아보면

맨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니콜라 테슬라입니다.

1915년 미국의 뉴욕 타임지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 물리학 상의

공동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기사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보도와 달리

1915년 노벨상의 영광은

이 영국 부자(父子)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두 천재 발명가

에디슨과 테슬라의

신경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벨상 수상의

기쁨보다

공동 수상의 불쾌함이

더 컸습니다.

결국, 두 사람에게 노벨상의 영광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둘은 평생에 걸쳐

최고의 맞수이자 라이벌이었을까요?

첫 만남

에디슨과 테슬라의 첫 만남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84년, 한 통의 추천서를 들고

테슬라는 에디슨을 찾아갑니다.

 

당시 에디슨은 백열등을 발명한 후

전기회사를 세우며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에 비해 테슬라는

이제 막 전기 기술자로

이름을 알리던 참이었습니다.

이미 천재 발명가로

인정받고 있었던 에디슨에게

테슬라는 신출내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테슬라에게 에디슨은

훌륭한 선배이자 뛰어난

발명가였습니다.

에디슨 밑에서 일하게 된 테슬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발명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인데

테슬라와 에디슨은

왜 갑자기 서로 미워하게

되었을까요?

갈등의 시작

에디슨의 전기 회사는 몇 년 후

큰 난관에 부딪히고 마는데

잦은 전기 고장 때문에

고객들의 집이나 건물에

화재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죠.

에디슨은 더 나은 직류 발전소를

개발하면

5만 달러를 준다 했고

테슬라는 그 골칫거리를

해결하겠다고 나섭니다.

테슬라는 결국 발전기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고

전기 고장으로 인한 화재 문제

역시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농담이라며 주급을

10달러

인상시켜준다 합니다.

5만 달러 ÷ 10달러

거의 100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죠.

이렇게 테슬라는 약속을 번복한

에디슨의 배신에 크게 실망합니다.

 

급기야 에디슨과 테슬라는

서로 다른 발명 방식으로

또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디슨의 명언 중에 이런 것이 있죠?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 퍼센트의 땀이다."

 

이렇게 에디슨은 발명이

공할 때까지 실험하는

스타일(노력파)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연구계획과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하는데

 

테슬라는 그와 완전 반대로

직관이나 영감을 중시합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발상법으로

발명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합니다.)

 

서로 다른 발명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했던

에디슨과 테슬라는 결국 갈라서고 맙니다.

 

또, 에디슨은 직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반대로 테슬라는 교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곁을 떠났습니다.

갈등의 폭발

몇 달 후, 에디슨은 테슬라가 발명한

새로운 전기 시스템이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당시 미국 대부분의 산업은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직류 시스템'은

전력 손실이 많아

아주 비효율적이었습니다.

테슬라가 발명한 것은

'교류 시스템'인데

이 '교류 시스템'은 다른 도시까지

송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렴한 값에 전기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이

미국 시장을 장악해버립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에디슨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을 공격합니다.

언론사에 편지를 써

'교류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이에 더해 직접적으로

공격할 방법을 생각해

코끼리를 '교류'로 감전시키기도 하고

사형집행을 위한 전기의자도 발명합니다.

   Execution of Leon Czolgosz with

    Panorama of Auburn Prison (1901) -

Edwin S. Porter

 

이렇게 '교류 시스템'의 위험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훗날 이는 전류 전쟁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전기 시스템이 되어

지금까지 주로 사용되는 것은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이었습니다.

 

이에 언론들은 앞다투어 테슬라를

최고의 발명가로 치켜세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테슬라의 시대가

열리나 했는데...

그런데 왜!

지금 우리가 발명가, 과학자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에디슨일까요?

에디슨의 반격 VS 테슬라의 고난

테슬라에게 위기감을 느낀 에디슨은

새로운 발명에 박차를 가했고

1893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발명품을 내놓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영화를 탄생시킨

세계 최초의 영사기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합니다.

 

이에 더불어, 최초의 영화 촬영 스튜디오

블랙 마리아(Black Maria)를 설립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에디슨은 수백 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영화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에디슨은

뛰어난 발명품을 만드는 동시에

최대의 라이벌인 테슬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발명들이

투자 받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했습니다.

그에 더해, 테슬라가 에디슨의 회사에

기여한 발명품

역시 소유권을 주장하며

사례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에 테슬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언론사를 통해

에디슨의 이러한 행위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특허권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테슬라는

발명 아이디어를 빼앗기기 일쑤였고

발명가로서 입지가 좁아진 테슬라는

사람들에게 잊히고 맙니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발명에 대한 열정은 같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는데요.

그들의 마지막도 서로 달랐습니다.

에디슨은 성공한 사업가로서

유복하게

84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테슬라는 자신의 발명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쓸쓸하고 빈곤한 말년을 보내다

87세로 숨을 거둡니다.

에디슨 VS 테슬라

끝나지 않았다?

에디슨이 세운 회사 'GE'

(General Electric Co.

제너럴일렉트릭사)

테슬라의 이름을 딴 전기차 회사 '테슬라'

(Tesla Motors, 테슬라 자동차)

과학계의 획을 그은

두 맞수의 경쟁

삶의 질을 높이고

인류의 진보를 앞당긴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의 발명품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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