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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속 로맨스 커플

문방구아들stationerystoreSon 2023. 9. 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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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속 로맨스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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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공주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 고려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 날.

공원왕후(공민왕 모친):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하지 않습니까?"
공민왕: "공주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원왕후: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왕 또한 결국은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여 심히 슬퍼하십니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삼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ㅡ 《고려사절요 29권》, 1373년(공민왕 22년) 3월

괜히 세기의 로맨스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이름은 보르지긴 부다시리(ᠪᠣᠷᠵᠢᠭᠢᠨ ᠪᠦᠳᠬᠠᠱᠢᠷᠢ, Borjigin Budashiri). 공민왕이 '아름다운 보배'라는 뜻의 '왕가진(王佳珍)'이라는 고려식 이름을 직접 지어주기도 했다. 외국인 왕비, 그것도 적국 공주 출신의 왕비였던 이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이한 케이스.


원나라 공주출신임에도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아낌없이 서포트해주어 그야말로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었다.
노국공주는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이고 때문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反 공민왕 세력들은 서열상 자신들보다 높고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나서면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노국공주 본인은 정치에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그녀의 입지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정치적 보호막이 되어 주었고, 이런 자신의 입장을 남편의 개혁정책을 위해 적극 이용했다.





흥왕사의 변 당시에는 공민왕을 밀실로 숨기고 반란군 앞에 나아가 남편을 지켰다.
반란군도 원나라 공주를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슬에 비해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신료들은 물론 어머니인 공원왕후마저 청을 올려 어쩔 수 없이 후궁을 들였다. 들일 때는 노국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지만, 들이고 나서는 노국공주의 투기로 인해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공민왕은 노국공주 외의 여자에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드디어 둘 사이에 첫 아이를 가졌지만 결국 난산으로 사망한다. 공민왕이 얼마나 절실하게 공주의 순산을 바랐는지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하고, 공주가 위독해지자 산천과 사찰에 기원을 드리도록 했으며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했지만 끝끝내 아이도 공주도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왕은 공주가 죽은 뒤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야말로 지고(至高)의 사랑.
적국 간의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세기의 로맨스로서 창작물에서도 흥하고 현대까지도 여러가지 이야깃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고려버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간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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