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도산 안창호의 초라한 부고기사
도산 안창호 장례
- 명 십이일 발인, 장지 망우리
- 친족 이외 회장 사절
"도산 안창호의 장례는 명 십이일에 거행하게 되엇는데 오후 두시 경 경성제대의원 시병실로부터 발인하야 망우리 묘지에 향한다. 그러고 사정에 의하야 공식장례는 폐하고 친족 이외의 회장은 일체사절하게 되엇다."
- 1938년 3월 12일 동아일보
굳이 친족 이외의 방문을 사절한다고 강조된 1938년 동아일보의 작은 부고 하나.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독립 운동가의 서거에 군중들이 운집할까 두려워했고, 망우리 장지에 헌병을 보내는 등 여러 방면으로 그 장례에 통제를 가했다.
도산의 1937년도 수감사진을 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위풍당당한 중년의 모습과는 달리 기력이 쇠해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도산이 말년에 수 년 동안에 걸친 수감생활로 인해 여러 중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도산의 임종시 병명은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겸 위하수증'.
당시 병보석으로 풀려난 직후 그 수척한 모습을 본 지인들이 도산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 1955년 세워진 묘비
도산이 말년에 지인과 나눈 대화에서 그가 수감기간에 얻은 병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너무 슬퍼하지 마오. 부인과 아이들 평안하오? 이렇게 어려운 곳을 오니 참 반갑소.
내 홑이불을 들고 내 다리와 몸을 보오. 이렇게 되곤 사는 법이 없소.
나는 본래 심장병이 있는 중 대전 감옥에서 위까지 상한 몸으로 이번 다시 종로서 유치장에서 삼복 염천 좁은 방에 10여 명이 가득 누웠으니, 내 몸은 견딜 수가 없었소.
의사의 말이 나는 지금 일곱 가지 병이 생겼다고 하오. 지금 이가 상하고 치아가 빠졌고, 폐간이 상하고, 복막염, 피부염 모두 성한 곳이 없소.
그 종로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전신에 뼈만 남고 피가 말랐소. 나를 일으켜 안아 주시오."
이렇듯 갖가지 병을 얻은 말년의 도산은 늙은 환자라는 이유로 수감기간 동안 일본인 간수들로부터 "키다나이야츠!(더러운 자식)"라는 모욕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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