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한 정보

오헝제국의 위대한 명장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

문방구아들stationerystoreSon 2023. 8. 22. 13:47
반응형
728x170

  오헝제국의 위대한 명장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 

300x250
1
반응형

 

 

프란츠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는 매우 존경받았던 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 군인이었다.

일찍이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었지만 곧 그의 군사적, 정치적 업적은 비판받게 되었다.

그의 일생엔 많은 굴곡이 있었으며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다.

 

회첸도르프는 1852년 11월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오스트리아 장교, 공무원 집안이었다. 1815년 그의 증조부는 귀족작위를 받아냈으며 그의 아버지는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와 1848년 빈의 혁명 진압 때에 참전했었다.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는 어렸을 때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1863년까지 빈에서 국민학교를 다녔으며 그 뒤에 하인부르크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87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의 작전에서 처음으로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되었다.

1906년 콘라드는 군사작전참모 지휘관이 되었다. 그 해에 그는 매우 가파른 승진을 하게되었는데 이로인해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게되었다.

1910년 남작의 지위를 얻게되었으며 그는 더 많은 존경을 받게된다.

 

 

 

 

2

 

 

 

하지만 그 뒤에 그는 가파른 추락을 하게된다. 1911년 그는 카이저로부터 해임을 당하게된다. 그 이유로는 그가 당시에 외무부 장관이었던 아렌탈과 카이저와의 커다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콘라드는 항상 점점 커져가는 위협에 미리 대항하기 위해 더 많은 군비확장과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우선시해야한다고 주장했었다.

콘라드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루마니아 또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발칸의 소국들이 러시아와 접촉하기 전에 전쟁을 해야한다고도 생각했다.

카이저와 외무부 장관은 그의 이러한 주장에 반대했고 평화적인 정치적 해결책에 동의하고 있었다.

1년도 안돼서 콘라드는 다시 군사참모부 총장으로 돌아왔으나 그와 카이저 페르디난트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되어갔다.

콘라드는 여전히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유부녀였던 버지니아 라이니겐하우스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들어나 정치적인 스캔들을 일으키게된다.

 

 

 

 

3

 

 

 

사라예보사건이 벌어진 뒤 콘라드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여러차례 주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거절당했지만 결국은 승인이 떨어지게 된다.

 

 

 

 

4

 

 

 

7월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헝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콘라드는 그의 군대를 남쪽으로 배치시킨다.

그러나 러시아가 오헝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그는 그의 군대 중 일부를 갈리치아 지방으로 옮겨야만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승리할거라는 희망으로 그는 적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독일군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콘라드는 결국 러시아에게 점령당했던 갈리치아의 일부를 되찾아왔다.

독일의 도움으로 러시아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뒤 다른 이들과 콘라드를 위한 오헝제국의 특별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 3 최고사령부(Dritte oberste Heeresleitung)가 생겨나게된다. 그리하여 독일, 오헝 양 쪽에 서로간의 협조에 의지하게되는 비슷한 규정이 생겨나게된다..

최고사령부는 콘라드가 철저히 준비한 도나우 상륙작전으로 루마니아와의 전쟁에서 성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5

 

 

 

1915년 5월 1일 타르노프, 골리치아 돌파작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점령, 1916년 루마니아전선 방어 떄 콘라드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된다.

콘라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합병을 주장했지만 헝가리는 제국 내의 불균형이 평화협정에서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콘라드가 알바니아 합병을 주장했을 때엔 카이저가 반대하였다.

 

 

 

 

 

6

 

 

 

1916년 5월 콘라드는 결국 남티롤 전선으로 좌천되었다. 처음 남티롤전선에서의 공세의 시작은 나름 성공적이었으나 동부전선 러시아의 대공세로 다시 실패하게 된다.

콘라드는 발칸의 약소국들을 먼저 완벽히 제압해야 주 전장인 이탈리아 서부전선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계속해서 강력히 주장했다.

그와 지금까지는 열려있었고 복잡하지 않았던 독일장군들간의 관계는 점점 역전이 되어가고 어떠한 부분에서는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콘라드는 심지어 독일 최고사령부 산하의 오헝제국군의 산하부대에 있던 루덴도르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917년 3월 콘라드는 결국 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1917년 2월 11일 그의 해임 때까지 프리드리히 대공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1917년 콘라드는 서부 이탈리아 전선 지휘관을 맡게되고 1917년 1918년 티롤전선을 담당하게 된다.

6월 이탈리아 전선 대공세의 실패로 1918년 6월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소재로 인해 해임되게 된다.

 

 

 

 

7

 

 

 

이 때 콘라드는 백작의 지위를 얻게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는 빈의 전 근위부대를 맡게된다. 이 곳에서 그는 몇 달간 그의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일을 하게 된다.

1918년 12월 초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는 은퇴를 하게 된다.

그는 은퇴 후 자서전을 집필했으며 1925년 8월 25일 독일 바드 메르겐트하임에서 요양 중 사망했다.

 

 

 

 

8

 

 

 

그는 한평생 군인으로 살아왔고 다른 강대국들에 비해 뒤쳐저있는 오헝제국군을 개혁하는데에 헌신하였다.

오헝제국군의 발전된 조직과 높은 훈련도는 콘라드의 덕이기도 하다.

그의 극단적인 사고와 꺾이지 않는 고집은 그에게 있어 불행으로 다가왔다. 그는 현대 기관총과 변해버린 전장의 환경을 무시한 결과 전쟁 초반 그는 수많은 병사를 잃게되었다.

그의 발칸지배에 대한 비전도 군사력의 부재로 인해 단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다.

콘라드는 항상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확장을 통한 힘이 그의 비전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잘못된 전술과 정치적 오판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지지 않았다. 그는 훗날 자신은 그저 군사전문가였을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까지도 콘라드의 삶은 학계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콘라드의 계획은 종이 위에서 봤을 때는 훌륭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재앙적인 결말을 맞았다. 특히 프세미시우 요새 해방작전이 그의 재앙적인 결말을 초래한 작전들 중 대표적인 예라고 불 수 있다.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