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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유관순의 절친

문방구아들stationerystoreSon 2022. 3. 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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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유관순의 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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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생존해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라고 들었습니다.

▲(유)관순이와는 6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라면서 사방치기를 하고 이리 저리 들판에서 뛰어놀았던, 말 그대로 소꼽친구였지요. 관순이는 씩씩하고 무척 총명한 아이여서 배울 점이 많았어요. 그러던 중 같은 학교(이화학당)로 진학을 하게 됐고 비록 다른 반이었지만 만세운동을 함께 기획할 정도로 자주 어울렸어요. 1919년 3·1운동에 조선의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지요. 저희 둘 역시 그랬고. 그러던 중 관순이가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였어요. 저도 함께 가서 태극기를 만들어 나누어 주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만 되면 만세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충북 진천으로 청주로 여기저기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장터에서 “일본을 타도해서 우리 땅에서 꼭 내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설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열변을 토하니 모든 이가 열띤 호응을 보여줬지요. 그 장면이 기억에 남네요.

-그러던 중 유관순 열사가 잡혀 감옥에 투옥되셨지요.

▲독립운동을 한창 벌이던 어느날, 일본 순사가 장터에 나타나 관순이를 체포해 갔고, 충남 공주 소재 감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관순이네 집에 불을 질러 살림살이는 물론 부모님의 목숨도 앗아갔어요. 관순이는 그후 서대문 감옥으로 옮겨졌고 그 곳에서 일본인 판사에게 재판을 받아 7년형을 선고받았어요. 그 당시 저도 같은 감옥에 투옥돼 있었는데 우리 둘은 따로 갇혀 있어 서로 얼굴을 볼 수도, 대화할 수도 없었어요. (눈시울을 붉히며)관순이는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일본 경찰의 모진 폭행으로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후 남동순 할머니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들이 “걔(유관순 열사)보다 죄가 적지만 그래도 조직활동을 많이 했으니깐 너도 가만히 놔둬서는 안되겠다”라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일본어로 “너희가 악착같이 발악을 해도 쫓겨갈 날이 멀지 않았다. 너희 나라에서는 나라를 뺏기게 생겼는데 여동생이나 누이가 가만히 있겠느냐? 우리나라를 이렇게 해놓고 너희가 잘 살 줄 아냐?”고 악다구니를 썼지요. 그러니까 일본경찰이 ‘다마레!’(시끄러워·だまれ)라고 소리쳤어요. 내가 일본말을 잘하고 조리있게 조목조목 대드니까 당하지 못했지요.

-고문이 더 심해졌을 텐데요.

▲차마 말을 할 수도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양팔을 뒤로 묶고 두 다리도 동여맨 다음 주전자에다 고춧가루를 타서 코에 마구 들여다 부었어요. 이게 말로 하니깐 쉽지 차마 사람이 당할 수 없는 악랄한 짓이에요. 그들은 정말로 견딜 수 없는 부분만 골라 고문을 했지요. 이쑤시개 같이 뾰족한 것으로 손톱과 살 사이에 끼워넣었을 때는 정말 입이 그냥 딱 벌어질 정도로 아팠어요. 조직원들이 누군지 자백하라고 계속 고문했지만 내가 입을 열면 몇 천 명이 죽어나는데…. (내가)죽어서 씨앗이 돼야 열매가 열리며 나라가 제대로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난 모른다고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뗐어요. 고문을 당하면서도 계속 호통을 치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더니 나중에는 “양잿물보다 더 독한 계집”이라고 하더군요.

-여학생 때부터 독립운동을 꾸준히 하셨는데 여성으로서의 삶은 어떠했는지….

▲믿지 못하겠지만 아직까지도 처녀랍니다. 이 나이까지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았지요. 교복도 안 벗고 학생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가 해방하고 나니 내 나이가 벌써 40세가 넘었지 뭡니까. 3·1운동 때 15개월을 복역하고 나온 뒤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3·1운동 직후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인 ‘7인 결사대’에서 홍일점으로 활동했고 중국 상해, 연해주와 몽골로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러 다녔지요. 상해로 가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넌 것이 수십 번은 될 거예요. 광복 이후 중년의 나이가 되서 사회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보통 여성들과 다르게 살았던 것 같아요. 태극기를 나눠주고 인권 등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어요.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고요. 한국부인회 활동만 20년 넘게 했습니다. 지금도 자식도 없이 어떻게 사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됫글 배워서 말글 써먹는다고.(웃음) 나이 오십이 넘어서 대학 공부(건국대 야간)도 하고 교회나 대학에서 강연해 달라고 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 전문 : 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77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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