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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큰 타투를 한 아이돌 모음통장 잔액 800만원 그마저 기부…
거인은 그렇게 떠났다.
선종하신 후 통장을 보니 잔액이 800만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 돈도 평소 요청해오신 대로 기부하거나 작은 선물을 구입해 의료진 등 알고 지내던 분들에게 나눠드리려고 합니다. 정 추기경께서는 늘 '나눔'을 강조하셨습니다. 자기가 가진 시간마저도 이웃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전 서울대교구장)이 선종한 다음 날인 28일 오전 10시 브리핑에 나선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면서 통장 잔액 이야기를 꺼냈다. 장내가 약간 술렁거렸다. '역시' 하는 분위기였다.
정 추기경은 지난 2월 위독할 때 무료 급식시설인 명동밥집과 아동교육기관 등에 이미 1000만원씩 기부해 재산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800만원은 그 이후 두 달 동안 추기경 생활비와 보훈연금(추기경은 6·25전쟁 참전 군인이다)으로 들어온 돈이었다. 그 돈마저 다 내어놓고 떠나는 거인의 뒷모습은 감동을 넘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허 신부가 전하는 27일 밤 정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은 평화로웠다.
허 신부는 "염수정 추기경과 주교님들, 사제들, 수녀님들, 주치의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주 편안하게 눈감으셨다"며 "오래전부터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이 말씀이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향년 90세로 선종한 정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장소인 명동성당에서 인생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산증인이었다.
그는 1931년 12월 2일 서울 중구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원모는 경기고 전신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두 차례 투옥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부가 명동성당 사목회장이었기 때문에 정 추기경은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명동성당 새벽미사에서 복사(服事)를 서며 보낸 그는 계성보통학교 시절부터 책에 빠져 지냈다. 특히 일본어로 된 과학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부터 발명가를 꿈꿨다고 한다. 자신의 희망대로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했지만 운명은 그를 과학의 길로 이끌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옆에서 잠자던 친척 동생이 폭격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정 추기경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돼 미군 통역병으로 근무하던 정 추기경은 우연히 영어로 된 '성녀 마리아 고레티'라는 책을 읽고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외아들이 신학교에 가려고 하자 당시 명동성당 신부였던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만류했는데 어머니가 직접 나서 노 주교를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54년 신학교에 입학한 정 추기경은 1961년 사제품을 받았다. 교구 신부와 신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1968년 로마 우르바노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1년 반 만에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은 정 추기경은 1970년 국내 최연소 주교로 임명된다. 주교 임명 즉시 청주교구장이 된 그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대로 낮은 곳으로 임해 발로 뛰는 선교를 시작했다. 그가 부임하면서 4만8000명에 그쳤던 청주교구 신자 수는 20년 동안 8만명으로 불어났다.
정 추기경은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정년을 맞으면서 한국 가톨릭의 중심인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는 취임 후 서울대교구에 조용한 변화를 이끌었다. 사제 투표로 교구 지구장을 선출하는 민주적 사목 체제를 만들었고, 교리와 규율 등을 전반적으로 토의하는 교구 시노드(synod)를 개최해 밑바닥의 여론을 들었다. 생명운동에 열심이었던 그는 2006년 공개적으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약속했다. 당시 서울대교구 사제 중 600여 명이 정 추기경과 뜻을 함께했다.
정 추기경은 권위 있는 교회법 학자이기도 했다. 생전에 책 50여 권을 번역·저술했다. 그가 남긴 '교회법전' '가톨릭 교리 입문' 등은 가톨릭계 스테디셀러다.
정 추기경 비서를 지낸 허 신부는 "정 추기경은 학자 체질이시라 어떤 것을 결정할 때 장고하시는 스타일이지만 한번 결정하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정 추기경은 정치나 이념에 관한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실무를 해내는 거인이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본당 수는 100개가 늘어났고, 생명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1898광장 등 명동성당 주변이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그가 펴낸 교회법 해설서는 정전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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